대온실 수리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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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금희 소설은 처음 읽는 듯. 아름다운 문장이 많다. 22p 은혜가 배웅하며 말했다. 찬 밤바람 속에서도 여름으로의 진입은 분명히 느껴졌는데, 그건 공간이 훤하게 열리는 개방감 같은 것이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자기가 원하는 만큼의 에너지를 성성하게 드러내도 될 정도로 공기가 바다가 하늘이 열리고 있었다. 나는 밤의 바다에서 아마도 낚시꾼들을 태우고 나갔을 어선들의 피로한 불빛을 지켜보다가 손을 흔들며 차에 올라탔다. 24p 나도 싱겁게 응수했다. 누가 들으면 쓸모없게 느껴지는 얘기를 하면서 핵심을 적당히 피해 가는 데 우리는 죽이 잘 맞았다. 그렇게 눈앞에 놓인 너무 어렵고 뜨겁고 슬픈 문제는 에두르고 각자 가능한 만큼의 걱정을 했다.
따옴표 없이 주어나 형용사를 이어서 표현하는 부분이 좋다. 꼭 옆에서 이야기를 듣는 것 같다. “공기가 바다가 하늘이 열리고 있었다” “너무 어렵고 뜨겁고 슬픈 문제”
25p 대화하는 동안 우리는 마당 장대에 널려 건조되고 있는 가오리를 올려다보았다. 연처럼 꼬리가 긴 그 생선은 밑에서 쳐다보면 눈코입이 늘 웃는 듯 보여서 문제였다. 마주하고 있으면 많은 것들이 시시해졌다. 바람이 한번 불고 지난 뒤의 모래사장처럼 마음의 표면이 평평하게 균형이 맞춰지는 게 느껴졌다. 고작 그 시시함으로. 25p 지금 생각해보면 그날의 대화 어디에도 가고 싶지 않다는 말은 없었다. 그러니 아빠는 내 마음을 읽었을 것이다.내가 해보고 싶어한다는 걸, 수면에 드리웠던 낚싯대를 들어올려 아빠와는 다른 미래를 낚고 싶어한다는 걸. 29p “그러면 뭔데? 왜 나랑 절교하는데?” “이달에 가는데 니는 이달에 말했지. 남겨지는 사람에 대한 예의가 없었다. 매정하기가 쏜물 같은 년이다.”
매정하기가 쏜물 같은 년. 사람에 대한 예의가 없었던 어린 시절의 나의 모습이 떠오른다.
35p 제갈도희가 한마디씩 할 때마다 배경음처럼 소목수 방에서 소장의 욕설이 들려왔다. 공사 대금만 받고 도망간 하청업체 인간들을 잡는 날에는 자르고 부수고 갈아버리겠다는 내용이었다. 은세창은 사실 자기네 일이 무안흥신소 다를 바 없다고 비유했다. 다만 그 주체가 건물일 뿐, 사람이 살면서 별의별 일이 다 일어나듯 건물에도 각종 신상 문제가 동일하게 일어난다고. 탄생부터 죽음까지, 그러니까 설계부터 완공을 거쳐 건물로서 사는 내내 좋은 일도 나쁜 일도 다 겪는다고.
사람이나, 건물이나, 건물에도 사람처럼 생과 사가 있고 그 모든 문제를 겪는다는 말에 고개가 끄덕끄덕. 최근 읽은 빛이 이끄는 곳으로 라는 책에도 “집”에 대해, 집을 거쳐간 많은 이들의 이야기가 있다는 내용을 읽었었는데 일맥상통하는 내용이라서 고개가 또 끄덕끄덕.
49p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리사는 할머니에게 냉랭했고 확실히 적대적이었다. 나는 어쩌면 잃어본 적이 없어서 저러는지 모른다고 짐작했다. 부산에 부모님이 계신다고 했고 할머니도 있으니까, 가족을 잃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가족 아쉬운 줄을 모르게 마련이었다. 명절이면 섬 밭두렁에 도시 차들이 열 지어 주차되어 있고 거기서 내린 껄렁한 아이들이 자기 사촌들을 따라 마을 구경 다니는 모습들까지, 그 모든 게 마음 서늘하도록 부러운 사람도 있다는 걸. 63p “벌레가 포도밭을 다 먹어치우는데 어떻게 몰라.” “그럼 너무 잘 알아서? 너무 잘 알면 오히려 무서우니까. 책임져야 되거든.” 65p “아픈 건 다 나았냐?” 섬에 소문이 어떻게 났을까 나는 잠깐 당황했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주머니는 모자를 벗어서 내 머리에 씌워주며 올해가 지나면 다 괜찮아질 거라고 위로했다. “올해 비가 어찌나 많은지 염전도 다 망했다.” 나는 멍하니 앉아 있따가 그러면 어떡해요? 하고 조그맣게 물었다. ”장마가 그런데 어쩔 것이야, 다음을 기다려봐야지. 그런다고 바다 소금이 어디 가버리는 것도 아니고. 사는 게 말이야, 영두야. 꼭 차 다니는 도로 같은 거라서 언젠가는 유턴이 나오게 돼. 아줌마가 요즘 운전을 배워본 게 그래.” “유턴이요?” “응, 그러니까 돌아올 곳만 정신 똑바로 차리고 알고 있으면 사람은 걱정이 없어. 알았지? 잘 왔다, 잘 왔어.” 이제 염전에는 골프장이 들어섰고 아주머니는 강화 본섬에서 편의점을 운영하고 있었다. 하지만 허위허위 걸어 염전으로 갔던 그날은 분명 나를 바꿔놓았다. 아주머니에게 모자를 돌려줄 생각도 못한 채 너무 투명해서 여름 하늘을 그대로 되비추는 염전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돌아온 그날은. 70p 그런 사람을 무작정 만나러 가라니 나는 입맛을 잃은 것 가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래 봤자 불친절하기밖에 더하겠어, 하는 오기도 생겨났다. 사는 게 친절을 전제로 한다고 생각하면 불친절이 불이익이 되지만 친절 없음이 기본값이라고 여기면 불친절은 그냥 이득도 손실도 아닌 ‘0’으로 수렴된다. 내가 그렇게 말하자 제갈도희는 숟가락을 놓더니 “아, 정말 명언이다. 저 언니라고 부르면 안돼요?”하고 박수를 쳤다. 75p “일 재밌어요?” 차창에 기대어 있는 제갈도희에게 물었다. “아직 일년밖에 안 돼서 잘 모르겠어요. 근데 그건 마음에 들어요. 안 멋있는 거. 실제로 건축사사무소에서 일해보니 아 정말 하나도 안 멋있구나 싶어서 좋아요.” “안 멋있어서 좋다니 그 또한 멋있는 일이네.” “아니, 영두님은 말을 왜 그렇게 잘하세요? 글 쓰시는 분이라 그런가, 원래 그쪽 분들은 다 그래요?” 87p 금성무는 그렇게 설득했고 세탁소 사장도 “지금은 겨울옷을 싹 정리해서 넣을 때지. 입을 때는 아니야” 하고 도왔다. 하기는 강화에 있었다면 지금까지 코트를 입고 다니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추웠고 그건 몸을 덥히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나를 안정적으로 눌러줄 얼마간의 무게가 필요한 것이었다. 그러지 않으면 나 같은 건 누군가 놓친 유원지 충선처럼 날아가버려도 그만일 테니까. 대문 밖만 나가면 아는 얼굴들이 나타나는 섬과, 사람 물살을 헤치고 다닐 때마다 생소한 얼굴들이 차고 슬프게 다가왔다 사라지는 이곳의 봄은 완전히 다른 계절이었다.
서울살이의 외로움, 특히 중학생 소녀 혼자 상경해있기에 더더욱 외롭고 추운 서울살이의 외로움을 이렇게 표현하다니. 이미 4월이라 봄인데 영두는 추웠고, 육체적인 추위보다는 그런 마음의 추위를 안정적으로 덥혀주기 위해 눌러줄 얼마간의 무게가 필요해 겨울 코트를 계속 입고 다녔던 것이다.
102p “사람을 믿는 게 잘못은 아니야. 네 말대로 그렇게 혼자라면 믿어야 살 수 있으셨겠지. 어떤 사람들은 그래서 누군가를 믿기도 해.” 111p “걸음아아, 날 살려라......” 그러다 나는 문득 울어버렸는데 유화 언니는 왜 우냐고 무안을 주거나 이유를 묻지 않았고 “아주 제대로 배웠다”하더니 그날 수업을 마쳤다.
학교의 음악 실기 시험을 위해, 악기라곤 배운 적 없는 영두가 무엇을 할지 고민하며 리코더를 연습하고 있으니 하숙집의 유화 언니가 장구를 가르쳐 준다. 장구를 처음 배우며 노래까지 같이 해야 실기 시험 점수를 잘 받을 수 있을 거라며 노래도 가르쳐 주는 유화언니. 문득 울어버리는 영두에게 이유를 묻지 않고, 잘 배웠다는 언니. 참 좋은 언니다. 요청하지 않았지만 가르쳐 주고, 울어도 무안을 주거나 묻지 않는 좋은 언니.
139p 쏜물, 강화물로 찬물을 가리키는 그 단어를 듣자 절교하자며 싸웠던 시절이 떠올랐다. 그래서 나한테도 그말 한 적이 있다고 상기시키자 은혜는 그랬냐? 무심히 되물었다. 내가 섬으로 돌아간 뒤 은혜는 우리 사이에 연락이 끊긴 때가 없는 듯 굴었다. 내색하지 않고 묻거나 알고 싶어하지도 않는 은혜에게서 안전함을 느꼈다. 아주 알맞은 온도의 이해였다. 147p “문화재등록을 안 했구나, 팔려고 내놓은 걸 보니, 이거 희귀한 2층 한옥 같은데. 언니, 여기 1층 2층 사이에 다락 있지 않았어요?” 나는 그렇다고 끄덕였다. 틈틈이 거기 내려가 무언가를 정리하던 문자 할머니 모습이 생각났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보이던 환한 가르마도. 제갈도희는 백팩에서 카메라를 꺼내 집 사진을 찍었다. “어려서 산 집도 멋짐이네요.” 초점을 맞추며 제갈도희는 엄지를 들어보였다. “나, 평생 들을 멋지다는 말 도희씨에게 다 들은 것 같아. 자존감 장난 아니게 높아진다.” “들을 만하십니다.”
어른이 되어 우연히 다시 찾은 낙원하숙. 하숙집 사진을 찍으며 제갈도희는 영두가 어릴 때 살던 집도 멋지다고 칭찬한다. 제갈도희는 칭찬을 참 잘하는 사람이다. 나도 칭찬을 잘 해준다. 칭찬을 해주면 나도 기분이 좋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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